【제천=경기뉴스원/경기뉴스1】 | 충북 제천(堤川)과 단양, 그리고 경북 문경에 걸쳐 있는 월악산 영봉(靈峯)들. 그 험준한 능선과 수려한 경관 속에는 단순한 자연의 위엄을 넘어, 한 민족의 역사와 비극이 서려 있다. 한수면(寒水面)이 품고 있는 이 월악산은 삼국시대에는 접경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동시에 신라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성지이기도 하다.

지난 7월 5일, 송계리(松界里)의 석기주 전 이장은 한수면의 옛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가 멸망한 뒤,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이곳 월악산에 들어와 천지신명께 신라의 재건을 기원하며 기도했다. 그들의 절절한 기도와 눈물은 오늘날까지도 월악의 골짜기를 맴돌고 있다.
덕주공주는 먼저 월악산 자락의 덕주사(德周寺)에 들어가 출가했고, 이후 마의태자와 덕주사에서 재회했다. 덕주사는 공주의 이름을 딴 사찰로, 그녀의 숭고한 의지와 슬픔을 대변한다. 마의태자는 또 다른 사찰인 미륵리 대원사(大院寺)를 석굴 형식으로 조성했으나, 석 이장은 자료 부족으로 지금껏 복원되지 못한 채 역사의 그늘 속에 남아 있다고 못내 안쓰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신라를 부흥시키기 위한 두 남매의 꿈은 결국 좌절되고 만다. 전해지는 구전에 따르면 덕주공주가 임신 후 유산하게 되자, 이를 비관한 마의태자는 그녀를 떠나 금강산(金剛山) 신계사(神溪寺)로 다시 돌아가고, 덕주공주는 그 충격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의 비극적인 사연은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한 많은 전설로 남았다.
덕주공주는 특히 법화경에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법화경판을 덕주사 법당 안에 두고 정성으로 모셨으나, 625 전쟁 중에 덕주사는 전소된다. 당시 절을 지키던 대처승이 떠난 뒤 사찰과 경판은 불에 휩싸였고, 신라의 마지막 숨결은 그렇게 잿더미가 됐다.
이후 1979년,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덕주사와 산신각, 보덕암까지 철거되며,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발자취는 더욱 희미해졌다. 박정희는 1980년 10·26 사건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회상했다.
과거 덕주사의 말사였던 정방사(淨芳寺)는 덕주사의 재산과 땅을 관리했으나, 해방 이후 농지개혁으로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염원, 신라의 위업을 잇겠다는 마지막 불꽃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꿈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오늘날 월악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명산이지만, 그 숲과 계곡 곳곳에는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슬픈 전설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단순한 전설이라 치부하기엔, 그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무언가를 되새기게 한다.
신념과 이상, 그리고 역사 앞에 놓인 인간의 한계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