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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시대, 도(道)로 천하를 움직인 유공(庾公)

고대 성씨 유씨(庾氏)의 동원공(東園公)을 기억하며

칼럼|문화·역사

 

 

기원전 3세기 말, 중국은 전례 없는 통일과 다시 그보다 거센 분열을 경험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칠국을 병탄하고 천하를 최초로 통일했지만, 그 제국은 단 15년 만에 붕괴한다. 그리고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다시 천하를 두고 다투는 시대가 도래했다. 

 

결국 유방이 한(漢)의 고조로 즉위하며 천하를 통일했지만,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제국은 세워졌으나, 권력 내부의 암투는 계속됐고 민심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이 같은 격변의 시기에 병력도 벼슬도 없이 제국의 향방을 바꾼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동원공(東園公)이라 불린 은자다.

 

동원공(東園公)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는 중국 고대 성씨 유씨(庾氏)의 후손으로, 후세에는 상산사호(商山四皓)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름 없이 덕으로 세상을 움직이다

동원공은 진말한초의 격동 속에서 조정에 참여하지 않고 상산(商山)에 은거하며 스스로를 지켰다. 그는 세속을 버리고 도를 좇는 삶을 택했으나, 세상은 오히려 그를 찾아왔다.

 

한 고조 유방은 본처 여후의 아들 유영 대신 척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조정과 백성의 여론은 이에 흔들렸다. 유방의 책사 장량은 “네 은자를 태자의 곁에 두라”고 조언했고, 그에 따라 동원공을 비롯한 상산사호는 세상 밖으로 나와 태자를 보좌했다.

 

유방은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태자는 이미 저 노인들의 우익(羽翼)을 얻었으니 바꿀 수 없다.”

 

동원공은 단 한 마디의 명령도, 단 한 자루의 검도 없이 황제의 결정을 바꾼 인물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덕이었고, 그의 침묵이 곧 권위였다.

 

유씨(庾氏), 고대 성씨

『사기(史記)』의 주석서 『색은(索隱)』에 따르면, 동원공은 성이 유(庾)씨로, 정원(園) 안에 거주해 '동원공'이라 불렸다고 한다. 유씨는 중국 고대 성씨 중 하나로, 뚜렷하게 권세를 누리기보다는 학식과 고결함으로 존중받은 가문이다.

 

그런 점에서 동원공은 단지 개인의 덕망을 넘어서, 유씨 성이 지닌 정신적 유산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 왕조의 안정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도(道)’가 권력보다 위에 설 수 있음을 실증한 존재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동원공은 이름보다 호로, 명예보다 실천으로 기억된다. 그는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기보다, 그 시대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유씨 동원공의 고사는 수천 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코 낡지 않았다. 천하는 다시 혼란스럽고, 지도자는 많지만 진짜 어른은 드물다. 말보다 신중하고, 권력보다 덕을 중시하며, 조용히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인물. 그런 존재가 지금 시대에도 필요하다.

 

결국, 권력은 무게를 가지지만, 도(道)는 방향을 바꾼다.

동원공이 그것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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