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후원회 제도는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인의 활동을 후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 출발했다. ‘비용조달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금의 흐름까지도 시민이 주도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 이상과 동떨어져 있다. 후원금은 극소수 정치인에게 몰리고, 다수의 정치인은 활동비조차 충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자금력에 따라 정치 생태계의 판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선 정치 자금 모금의 중심을 ‘개별 정치인’이 아닌 ‘정당’으로 옮기고, 이를 소속 의원에게 균등하거나 합리적 기준에 따라 배분하는 구조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브랜드'가 아닌 '정당의 이념'에 후원해야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개인의 스타성이 아니라, 정당의 가치와 정책 플랫폼이다. 유권자는 인물만이 아니라 정당의 철학과 노선을 보고 투표하며, 결국 정치란 다양한 의견을 정당이라는 틀 안에서 조율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정치 자금도 개별 인물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정당 중심의 정치 자금 구조로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건강한 방향이다. 후원자들은 정치인을 선택하기보다는,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과 노선에 공감하여 후원하고, 그 자금을 정당이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방식이야말로 ‘시스템 정치’로 가는 길이다.
자금의 불균형은 기회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후원금 쏠림 현상은 정치인의 활동 기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금이 풍부한 정치인은 미디어 노출, 지역 행사, 정책 연구 등에 많은 투자를 할 수 있고, 결국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다. 반면 신인 정치인, 젊은 정치인, 여성 정치인은 제대로 된 활동조차 해보지 못한 채 사라지기 쉽다.
이러한 구조는 정치적 다양성과 경쟁의 원칙을 해치는 불공정한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정치인이 동등한 출발선에 서고, 시민의 선택에 따라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이 정치 자금을 균형 있게 배분하면, 정치의 문턱은 낮아지고, 다양한 목소리가 국회에 진입할 수 있다.
️제도 개선을 위한 제안
정당 중심의 정치 자금 제도를 실현하려면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정당 중심 모금 시스템 강화: 시민이 정당에 후원하면, 정당은 자체 기준(활동 실적, 정책 기여도 등)에 따라 자금을 의원에게 배분
개별 정치인의 후원 한도 축소 또는 폐지: 자금이 인물 중심으로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조정
정당 보조금과 후원금 통합 관리: 국가 보조금과 민간 후원금을 통합해 예산 편성의 효율성과 투명성 확보
이러한 변화는 단지 자금 배분의 문제를 넘어서, 정치의 구조 자체를 시민 중심으로, 공정하게 재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룰’ 위에서 작동한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시민이 누구를 후원하든 자유 아니냐”고. 물론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가 소수에게 권력과 기회를 독점하게 만든다면, 그건 이미 공정한 자유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뿐 아니라 공정한 경쟁과 동등한 기회라는 또 다른 축 위에 서 있다. 정치 자금의 흐름이 공정해야 정치의 경쟁도 공정하고, 정치의 결과도 시민을 위한 것이 된다.
정당 중심의 자금 모금과 균등 배분. 그것이야말로 비용조달 민주주의의 진정한 실천이며,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