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의 명령
세상이 나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검은 망토를 입고 있었다.
과거처럼 사슬에 묶이지 않았고,
내 입에는 왕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는 왕의 사자다.”
백성들은 그렇게 속삭였다.
내가 지나가는 길마다
문이 닫히고, 아이들의 울음이 멎고,
사람들은 기도보다 먼저 숨을 죽였다.
왕은 만족해했다.
그는 통치가 아니라 공포를 다스리고 있었고,
나는 그 공포의 형상이었다.
2. 나는 도구였다
반란을 진압할 때도,
세금을 거둘 때도,
의심을 제거할 때도 —
왕은 나를 보냈다.
나는 칼이었고,
그 어떤 죄보다도 정당한 폭력의 껍질이었다.
그들은 나를 괴물이라 불렀다.
그러나 가장 먼저
그 괴물의 발을 묶은 이는 왕이었다.
그는 내 죄를 잊지 않았다.
그는 내 과거를 내세워 이렇게 말했다.
"이 사자는 과거에 죄를 지었기에,
이제 나를 위해 속죄하고 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다만,
속죄는 점점 처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3. 쓰임이 다한 날
그날,
전쟁이 끝났고,
도시는 조용했다.
왕은 새로운 법을 선포했고,
평화와 질서를 말하며
"이제 피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궁정의 그림자 속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전령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를 찾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이제 너는 필요 없다.”
나는 물었다.
“내가… 더는 위험하지 않아서인가?”
그는 대답했다.
“너는 이제,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왕이었는지를
기억나게 하는 존재일 뿐이다.”
4. 다시 버려지다
나는 떠났다.
이번엔 철창이 아닌,
세상의 바깥으로.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
세상은 내가 없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왕은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었다.
내가 한때 구해준 이들조차
눈을 피했다.
그들 역시 나를
두려움의 유산으로 여겼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한 일이 죄였고,
내가 했던 속죄는 또 다른 죄였으며,
내가 받은 용서는 없었다.
5. 끝이 아니라 시작
한 언덕 위에 나는 앉았다.
머리칼은 바람에 날렸고,
손에는 칼도, 갑옷도 없었다.
나는 짐승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며,
이제는 괴물조차 아니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의 끝에 남겨진 한 존재였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는 누구의 것이 되지 않겠다.
이제 나는, 나의 죄도
나의 이름도
스스로 안고 살아가겠다.”
그날 이후,
사자는 사라졌다.
누군가는 그가 죽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숲에 돌아갔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그가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서
잊힌 자들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사자는,
다만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자유로웠던 순간은,
누구의 도구도 아니었던 지금 이 순간이다.”
에필로그: 누가 사자를 기억하는가
왕은 긴 세월을 다스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왕보다 사자의 전설을 더 오래 기억했다.
"그는 괴물이었지만,
스스로 괴물이라 불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왕에게 버림받았지만,
왕보다 먼저 진실을 보았다."
사자는 잊히지 않았다.
왕은 잊혔다.
그리고 어딘가,
거울을 보며 자문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누구의 도구인가?”
그 질문이 멈추는 날,
사자는 다시 걸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