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뉴스원/경기뉴스1】 | 말러의 여름 별장이 있는 오스트리아 아터제(Attersee)로 향하는 길은 음악 애호가들의 순례길이지만, 문학 독자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비엔나에서 서부철도를 타고 슈타인바흐 암 아터제로 향하는 길목의 아트낭-푸크하임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대표작 『소멸(Auslöschung)』에서 주인공 프란츠 요제프 무라우가 고향 볼프세크로 향하던 출발점이다.
최근 오스트리아 현지를 답사한 김용운 칼럼니스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이 여정을 기록하며, 베른하르트의 『소멸』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함께 읽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자물쇠'라는 상징을 통해 권력과 진실의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 장서관은 자물쇠로 봉인된 지식의 공간이다. 웃음과 비판적 사유를 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은 금서가 되고, 호르헤 수사는 교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끝내 이를 숨긴다. 금지된 것은 책 한 권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고할 권리였다.
『소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볼프세크의 도서관에는 가문의 권위를 떠받치는 가톨릭 서적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놓여 있지만, 무라우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문학과 철학서는 자물쇠가 채워진 책장 안에 감춰져 있다. 김 칼럼니스트는 "두 작품 모두 책을 숨긴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인간을 두려워한 권력을 그리고 있다"고 해석한다.
인물들의 역할도 서로 호응한다.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사와 『소멸』의 게오르크 삼촌은 금지된 지식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안내자다. 반면 호르헤 수사와 무라우의 부모는 교리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봉인하는 존재들이다.
결말 역시 상징적이다. 『장미의 이름』에서는 장서관이 화염 속에 사라지고, 『소멸』에서는 무라우가 볼프세크의 유산을 이스라엘 유대인 공동체에 기부하며 가문의 역사를 스스로 끝맺는다. 방식은 다르지만 위선으로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진다는 점에서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김 칼럼니스트는 작품 밖 현실에도 주목한다. 생전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 사회의 가톨릭 보수주의와 나치 협력의 역사를 정면으로 비판해 거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작품 무대인 볼프세크는 문학 애호가들의 순례지가 되었고, 잘츠부르크와 주변 지역은 그의 흔적을 문화관광 콘텐츠로 소개하고 있다. 생전에는 불편한 진실이었던 작가가 사후에는 도시의 문화 자산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김 칼럼니스트는 이번 답사를 통해 『소멸』과 『장미의 이름』이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한다. 권력은 언제나 진실을 자물쇠 뒤에 감추려 하지만, 문학은 그 자물쇠를 여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터제로 향하는 철길에서 시작된 문학적 사유는 결국 중세 수도원과 오스트리아 귀족 저택을 지나 오늘의 독자에게 도달한다. 시대는 달라도 진실을 감추려는 권력과 이를 드러내려는 문학의 긴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두 거장의 작품은 새삼 일깨워준다.























